메뉴 건너뛰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 대구캠퍼스

바른 신앙과 영성!시작이 중요합니다!
지금 총회신학에서 시작하세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 대구캠퍼스

바른 신앙과 영성!시작이 중요합니다!
지금 총회신학에서 시작하세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 대구캠퍼스

바른 신앙과 영성!시작이 중요합니다!
지금 총회신학에서 시작하세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 대구캠퍼스

총회인준 정통보수주의 신학연구원
청교도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요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 대구캠퍼스

총회인준 정통보수주의 신학연구원
청교도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요람

신학자료

디엘 무디

나그네2022.03.13 10:33조회 수 1585댓글 0

    • 글자 크기

디 엘 무디(D. L. Moody)

 

 183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州)의 노스필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디가 4 살 되던 해에 아내와 7남매, 그리고 빚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자연히 무디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생계를 돕기 위해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무디는 어머니의 청교도적인 교육에 힘입어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을 수 있는 열정과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 듣는 이에게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할 수 있는 언변, 그리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의 적극성 등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 17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와 메사추세츠의 클린톤에서 신문 배달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실수로 인해 해고당했다.

 

그 후, 무디는 보스턴에 있는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4가지 조건 아래 구두 수선 일을 하였다. 그 조건들 중에 교회의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것도 있었지만, 무디의 꿈은 빨리 돈을 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기에, 신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55년 4월 21일, 무디가 보스턴에 있는 교회에 나간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그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에드워드 킴볼이 그를 찾아왔다. 무디의 영혼을 걱정하던 그는, 몇 번이나 미루다가 그날 마음을 정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무디,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체험이 있는가?"
"글쎄요. …저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지금도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자네가 개인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네. 나는 자네의 영혼을 두고 기도를
많이 했네. 오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킴볼 선생과의 대화는,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 젖어 있던 무디의 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 날 무디는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 받은 날 아침, 밖으로 나가 만물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내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월 21일은

성령으로 제 영혼이 거듭난 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쓰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듭난 후에도 그에게는 10만달러를 벌겠다는 변하기 힘든 포부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멸망하는 영혼을 보았을 때 그는 어린시절부터 끊임없이 갖고 있던 꿈을 아낌없이 버린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꿈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불같은 정열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가 하루동안 한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잠자리에서도 일어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거듭난 지 1년 후 무디는 시카고로 가서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했다. 그는 처음에 아이들을 모으는 일에 마음을 써서, 16명에 불과하던 주일학교가 몇 년만에 1,000여 명이 모일만큼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무디는,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60년부터는 사업을 정리하고 복음 전도에 전무했는데, 술집을 개량하여 만든 그의 설교 장소에는 주로 빈민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후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교회(일리노이 스트리트)가 지어졌고, 무디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세움을 입었다.

 

그 후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의 노예 폐지론을 지지하며 전쟁터로 달려간 무디는 군인 교회에서 1,500여 차례 집회를 가졌고, 매번 집회를 연병장에서 가져야 될 정도로 그의 집회에는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어떤 교리에도 매이지 않았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죄를 모두 사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치중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관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서 그가 가는 곳마다 비방하는 무리들이 뒤따랐지만, 그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고 복음 편에 섰다. 1867년 무디는 영국을 최초로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무디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기 위해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와 찰스 스펄전, 그리고 헨리 발리 목사를 만나게 해주신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무디의 정열적인 전도 방법과 교회사업에 대해 듣고는 "30세가 된 무디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디를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무디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속에 자신이 쓰임을 받게 된 것임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또 찰스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는 무디는 충격을 받게 된다.


스펄젼의 설교의 힘과 해박한 지식 앞에 그는 자신의 보잘것 없음과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 외치게 된다.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이런 낮아짐 속에서 그는 헨리 발리목사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며 무디는 그의 평생의 지침을 얻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무디는 이 말에 놀라게 된다.

갑자기 그는 그 자신이 크고 유명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조그만 무디와
하실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디는 헨리 발리목사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며, 그 말은 그의 생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영국을 다녀온 후 무디는 청소년 설교자 헨리 무어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헨리 무어하우스는 무디의 교회에서 6일 동안 요한복음 3장 16절 한 구절로 설교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헨리 무어하우스는 매일 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설교하게 되었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 그는 강단에 서서, "여러분 저는 온종일 설교할 새로운 본문을 찾아 보았습니다만 요한복음 3장 16절보다 더 좋은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또다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역설하였다.

 

설교의 마지막에는 그는 "저는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둔한 이 혀로는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내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능자의 앞에 있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하나님의 세상 사랑하심을 들을 수 있다면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일 것입니다."

 

무디는 이 청소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두 가지의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먼저는 말씀의 무한한 깊이를 알게 되어 그 후 성경을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모든 설교의 중심을 성경에 두게 되었다. 학교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과정 5년 뿐인 그였지만 그는 부지런했고 매일 새벽 4시면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학자가 되었다. 만일 능력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능력을 주시면 행사케 하시는 주체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등한히 하고서 결코 그 능력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무디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설교할 때는 그 시간이 오전이건 오후건 할 것 없이 청중이 몰리게 된다. 이것은 다름아닌 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헨리 무어하우스로부터 무디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배우게 된다. 그 동안 무디는 하나님께선 죄인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리라는 설교를 통해 무서운 지옥 대신에 천국을 가야한다고 설교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어하우스는 사랑의 하나님을 말해줌으로써 죄인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공포에 쫓기어 천당을 가는 노예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어 돌아오는 아들들을 원하셨던 것이다. 무디는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의 경험과 헨리 무어하우스로부터의 교훈은 그후로 무디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교훈이 되었다.

 

1871년 시카고의 파웰홀에서 설교를 하고 폐회기도를 했을 때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하게 된다. 잿더미가 된 거리에서 무디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집도, 그의 교회도, 그의 주일학교도. 하지만 재가 된 그 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잃은 것보다 구한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된다. 영국에서 그가 얻은 것은 화재로 잃은 것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셨던 것이다.


잿더미 된 도시의 피난민 구제소에서 그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1873년 무디는 영국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복음전도의 문은 궁핍과 고난을 함께 수반하는 어려운 것이었다. 무디 개인의 자비로 시작된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방해를 받게 된다. 종교가들의 비방과 복음전도방식(무디는 설교에 앞서 생키로 찬송가를 부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다)에 대한 불만, 게다가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모함(근거없는 소문에 의한) 등 그의 전도를 방해하는 힘이 너무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도록 맡겼기에 3년간의 영국 전도여행은 영국이라는 섬 전체를 진동시키게 되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수천의 타락했던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영국 전체를 교파적인 불일치에서 떠나 복음주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그는 영국을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임 받은 것이다. "묵도하심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무디가 영국에서 돌아온 뒤 미국의 온 대륙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시초가 된 뉴욕집회의 첫마디 말이다.  이로부터 미국대륙(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 시카고, 보스턴과 그 외의 중소도시)은 하나님께 모든것을 내어 맡긴 한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

1876년부터 시작되어 1881년까지의 미국의 전도집회에서 무디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짧게는 몇 주에서부터 길게는 몇 달에 걸쳐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후에도 무디는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복음이 필요한 곳,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될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하게 된다. 무디는 그의 생애를 통해 2억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외에도 교회와 성경학교, 성경연구원, 서적협회 등 많은 기관들을 발족시켰다. 그는 세상에서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는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자신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계속해서 쓰실 수 있던 이유는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겸손을 꾸미는 자가 아니었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겼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욱 놀랍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다가 스스로 높아짐으로 그 길에서 어긋나는지 모른다. 무디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기 바로 직전까지 사용하신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디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디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컬컬한 목소리와 많은 문법적 오류 등 설교에도 결함이 많았지만, 그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위의 말처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도구로 쓰셔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심령들을 건지셨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가 남긴 여러 말씀들을 통해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후부터 그는 사람의 영혼에 강하게 역사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모든 일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자기에게 해로운 것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돈에 대해 너무도 깨끗했다. 그가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 그에게 돈은 다시는 시험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는 돈을 버는 방법을 알았고 능력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사용하게 되는 것이었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무디라고 서명하고 목사 안수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단지 평범하게 무디씨 혹은 부흥사로 불러주기를 원했다.

 

무디는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라는 것을 믿었다. 그는 실제적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론상의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의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말이다. "여러분은 어느 날 무디가 죽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말을 하나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욱 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1899년 12월 22일 세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세상에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D. L. Moody의 경우는 죽음의 상념과 죽음의 경험 그 자체를 동시에 나타내는 예의 하나이다.

무디는 1899년 죽음이 임박했다. 12월 22일 금요일 아침 그의 아들 윌은 복도 건너편 아버지의 방에서 무디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대지가 물러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고. 그 때 윌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무디는 말하기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윌,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무디는 의식을 잃어 갔다.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고 정말 행복하다고 하면서 의식이 끊어 졌다. 주치의가 구명 노력을 하자 다시 살아나 자기가 이 세상 바깥에 갔다왔노라고 말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애들도 만났다고 했다. 누구를 보았느냐고 묻자 무디는 아이린과 드와이트를 만났다고 말했다. 무디는 이렇게 말한 후 영원한 내세로 갈 신호를 받고,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안에와 있다"고 말하며 밝은 천국으로의 기대에 안겨서 숨져 갔다.

Mrs. D는 회복 후 그녀가 죽어 있는 동안에 본 일을 기술했다. 찬란한 밝은 빛에 휩싸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녀의 죽은 남편 등 친지들을 만났다. 그녀는 하늘 나라에 머물고 있고 싶었는데, 예수께서 그녀가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음을 알리도록 보냈노라고 말했다. 그 후 그녀는 의사(롤링즈)를 전화로 불러 자기는 하늘 나라에 가서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니 이번에는 내가 다시 살아나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천사는 번쩍이는 건물과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 동화 같은 도시의 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도처에 아름다운 빛이 가득 했다. 그 빛은 불타는 듯 현란했으나 눈을 가려야 할 만큼 강한 것은 아니었다. 황홀함 그 자체였다.

 


 

A. 부흥사 무디(Dwight Lyman Moody)의 성장배경

“드와이트 레이만 무디(Dwight Lyman Moody)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노드필드(Northfield)에서 가난한 석공인 아버지 에드윈(Edwin)과 어머니 벧시(Betsy)사이의 아홉 자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무디가 겨우 네 살 때 부친이 급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청교도 신앙을 지닌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김기홍, 이야기 교회사 (하),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4) p. 258.
무디는 어머니의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특별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며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오 과부의 재판관이시라”(시68:5)라는 말씀을 믿고 끝까지 자녀의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머니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살림이라 무디는 13세 되던 해에 공적인 교육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겨울에만 공부하고 여름에는 남의 집에서 목동의 일을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이러한 어린 시절 그는 주일이 되면 거의 오리나 되는 교회의 주일학교에 출석하였다. 그러다가 천팔백오십삼년 17살 때 보스턴 그의 아저씨(Samuel Moody )가 경영하는 홀톤(Holton's Shoestore)양화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저씨는 그가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인생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경험하게 되고 특히 젊은 시절 이 만남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 만남 중에서 가장 귀한 만남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무디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디가 보스턴으로 가서 나가게 된 교회에는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란 교사가 있었다. 킴볼 교사와의 만남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변화되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킴볼은 무디를 만난 후 그가 영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상태인데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디를 바른 신앙인으로 이끌기를 다짐하고 그가 일하는 구둣가게를 찾아가 성경 개인지도를 하였다.

B. 부흥사 무디의 하나님 만남

킴볼은 꾸준히 무디를 찾아가 근 1년 동안 그리스도의 사랑과 보혈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중 무디는 “하나님은 자네를 사랑하신다네.”라는 킴볼 교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양화점 뒷방에서 중생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때가  천팔백오십오년, 무디의 나이 십팔세 되던 해였다.

무디는 후에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문밖으로 나가서 지구에 비치는 밝은 태양 빛과 함께 주님의 사랑 속에 빠졌다. 이때에 보스턴 공원에서 노래 부르는 아름다운 새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새들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로 모든 창조물이 다 사랑스럽게 보였다.” A.P. Fitt, The Life of D. L. Moody(Chicago: Moody Press, 1990), pp. 19-22.

그가 하나님을 만나자 그의 시야가 달라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디는 그 날 저녁, 잠이 들기 전 노드필드(Northfield)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알려드렸다. “어머니,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로부터 처음 태어난 생일이지요? 십팔년이 지난 오늘(1855.4.21)은 제가 성령으로 거듭난 생일입니다.” 박종구, 무디 선생의 생애 (서울: 신망에 출판사, 1976), p.92.

천팔백오십육년 무디가 19살이 되었을 때 보스톤에서 시카고로 떠났다. 거기서 구두 파는 사람으로 일하며 그는 최초에 13명의 부랑아들을 교회로 데려왔다. 그 교회학교는
점점 커져서 1500명이 넘었다. 그러자 1860년 6월에 이르러 전도 사업에만 전념하고 그리스도의 일에 모든 시간을 바치기 위해 그는 사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이런 결단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자기 주일학교 교사가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병으로 고향에 내려가기 전 “그가 가르치는 학생 가정을 찾아가 전도하여 그 가정 전체를 구원하는 것을 보면서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장사에는 아주 흥미를 잃고 전도에 헌신하게 되었다.” 석호인, 신앙의 위인상 (서울:보이스사, 1975) pp.301-304.
그리하여 그는 연봉 7500불을 받고 있던 직장을 버린 후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연봉 300불 받는 직장으로 기쁘게 옮기고 주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다.

천팔백육십이년 무디는 에마 샬로테 레벨(Emma Charlotte Revell)과 결혼하여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면서 주일학교에 더욱 열심 할 수 있었고 부인은 이러한 남편을 따뜻하게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천팔백육십삼년 그는 그의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초교파 교회인 일리노이스 시카고 교회(Illinois Street Chicago Church)를 2만 불의 비용으로 세웠고 이것은 후에 메모리얼 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그는 불우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집도 없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 목회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무디가 여러 자선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는 모든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거듭남에 의해서만 그 궁극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성갑식, op.cit., p.334.

또한 무디는 남북전쟁 기간 동안 기독청년회 간부로 군인들을 전도하였다. 1861년 남북전쟁이 활발해지자 육해군 기독청년회를 조직하여 시카고를 거쳐가는 군인들에게 전도하였다. 남북전쟁의 최대의 격전은 천팔백육십삼년 7월 1일에서 3일까지 벌어진 게티스버그에서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남부는 전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8천여 명이 전사 혹은 부상당하였고, 북부 군도 2만 3천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천팔백육십오년 무디는 이러한 전쟁의 참화를 보면서 믿음으로 치유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남북 전쟁이 끝난 후 각 교회들을 찾아가 주일학교를 시작하라고 권장하고 주일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때 주일학교 연합회의 문제는 학생들을 가르칠 통일된 공과의 필요성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통일 공과를 만들어 미국 전역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도 이 공과를 사용하여 주일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무디는 기독청년회(YMCA)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였다. 천팔백오십칠년 시카고 기독청년회가 창립되었고 이때 그는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남북 전쟁이 끝나자 시카고로 다시 돌아와 청년운동에 진력하게 되었다. 무디의 열심으로 YMCA에 등록하는 회원들이 날로 늘어났다. 그래서 “무디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회관 건립을 위해 기도 드렸고 맥코믹(Cyrus McComick)의 1만불의 헌금과 그들이 모금한 돈으로 시카고 YMCA 회관인 파웰 홀(Farwell Hall)이 1867년 9월에 건축되었다. 그 후에도 미국과 영국의 YMCA 빌딩건축을 위해서도 여러 번 모금하였다.” A. P. Fitt., op.cit., p. 60.

천팔백칠십일년 10월 8일 ‘시카고 대 화재’가 일어나 그가 설립한 교회당과 교회학교가 잿더미가 되었고 다만 그의 처자와 그의 성경만이 무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부인 신자들이 그를 위해 더욱 헌신하기로 하였고 무디는 더욱 힘써 기도 드리는 시간을 통하여 두 번째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성령체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다시 나게 하신 후, 16년만의 일인데 곧 성령께서 나에게 충만하게 하신 일이다. 그 후로는 성령께서는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박석출, 무디의 부흥운동이 세계에 끼친 영향(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석사학위논문) p.35.

C.영국과 세계를 변화시킨 소명을 향한 생애

부흥사 무디의 소명을 향한 생애는 영국 부흥회를 통하여 놀랍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867년 무디는 영국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그가 영국을 방문한 목적은 그가 존경하던 설교자 스펄젼(C.H.Spurgeon,)과 고아의 아버지 뮐러(G. Muller,1805-1898)를 만나고 싶어서 였다. 무디는 챨스 스펄젼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깨닫고“주여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간곡하게 기도 드렸다.
무디는 1868년에 영국의 청소년 설교가 헨리 무어하우스를 자기 교회에 초청하여 6일 동안 집회를 가졌다. 헨리 무어하우스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는 같은 주제와 본문으로 일 주일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계속하였다. 무디는 이 설교가를 통하여 말씀의 무한한 깊이를 알게 되어 그 후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고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탕자와 같이 돌아오는 자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무디는 일차 영국 방문을 마친 1870년 인디아나 폴리스 (Indianapolis)에서 열린 YMCA 국제집회(International Convention) 때에 성악가 생키(Ira David Sankey:1640-1908)를 만나 전도사역에 합류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생키의 찬양지도에 거부감을 느끼며 심하게 반발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생키는 개신교 예배에 찬양의 은혜가 충만한 새 역사를 만들어 냈다.
무디의 두번째 영국 방문은 천팔백칠십이년 6월에 이루어졌다. 설교 전에 생키에게 찬송을 부르게 하였는데 이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무디는 설교 후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통성 기도를 하게 하였다. 매 집회 때마다 예상을 뒤엎고 수많은 사람들이 결단하고 주님께 돌아옴으로 영국 전체에 초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무디의 세 번째 영국 방문은 1873년부터 1875년까지의 사이에 있었다. 1873년 6월 17일부터 요크 지방 부흥집회를 시작으로 5주간을 계속되었는데 요한 웨슬레 이후 가장 큰 부흥운동의 불길이 요크에서부터 붙기 시작하였다. 이 집회 기간부터 무디의 집회는 "전 신도가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죄를 자복하게 하고, 한 시간 동안 찬송 부르게 하고, 누구든지 자신이 받은 신앙체험을 공중 앞에서 간증하게 하고, 새로 믿기로 결단한 성도들의 결단을 선언하게 하고, 설교 후에는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에딘버러(Edinburgh)의 뉴캣슬 집회가 3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부흥의 불길은 에딘버러 전역에 미쳤으며 글라스고우 부흥집회에서 마지막 주일 저녁에는 5만여 명이 회집하였는데 생키가 7천명의 즉석 성가대를 조직하여 총 지휘를 하여 더욱 감동적인 집회가 되었다.
그 후 런던에서의 집회는 천팔백칠십오년 3월 9일에서 7월 12일 까지 4개월 이상 계속 되었고 집회는 285차에 달했으며, 동원된 연인원은 259만 명이었다. 부흥은 런던 자체만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놀라움이 되었다. A. P. Fitt, op.cit., p.92.

무디의 부흥회를 통하여 영국에서 복음주의의 부흥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또한 생키를 통하여 찬송에 은혜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배시간에서의 찬송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정하게 되었다.
천팔백치립오년 11월 무디의 미국에서의 부흥회는 자기 고향에서부터 시작하여 친척들과 친지부터 큰 은혜를 받게 하였다. 그 후 뉴욕 집회는 1876년 2월 7일에 개회하여 4월 19일까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까지 진행되었다. 매일 7-8천명의 군중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2달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그리고 천팔백칠십육년 10월 시카고, 보스턴과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에 걸쳐 천팔백팔십일년까지 진행되었다.
평양신학교를 세운 마포삼열 박사는 무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1886년 여름에 25일 동안 251명의 학생들은 헤르몬 산 (Mount Hermon)에서 모임을 갖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와 함께 이야기하며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그들 중에 21명이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까지 수립하는 데까지 발전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26일째에는 약 100여명의 학생이 반드시 해외 선교사라는 명칭이 아니더라도 해외의 선교적 봉사에 협력 내지는 헌신한다는 데 뜻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무디는 대학생들을 위한 자원봉사대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무디는 천팔백구십삼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기간에 부흥집회를 갖기 위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각 국으로부터 100명 이상의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했으며 1895년에는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였다.

무디는 평신도였지만 설교를 잘하였다. 음성도 좋지 못하고, 콧소리를 하며, 문법에도 맞지 않고, 또한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힘이 있었고, 설득력이 있었으며, 또한 사람을 끄는 영력으로 세계의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하나가 되었다. 교회 역사가들은 하나님께서 무디를 계속해서 사용하신 것은 그가 겸손하여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디의 설교는 야외 대중집회로 청중들을 회개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공된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는 단순하고 감정적인 것이었다. 무디의 설교를 통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감동을 받게 되었고 해외 선교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이형기, 세계교회사II , op.cit., p.479.

교육받지 못한 무디는 교육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적으로 교육 연구소등에게 근본적인 협력을 하였다.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최후까지 충성하던 무디는  천팔백구십구년 11월 8일 미조리 주 캔사스 시에서 일주일 동안 집회를 이끌고 있는 동안 건강의 악화로 남은 시간은 토레이(R.A Torrey)에게 맡기고 고향 노드필드로 갔다. 그리고 그 해 12월 22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D. 자신과 부흥사 무디와의 영적인 만남

1. 무디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자신과 비교해 보자.
2 . 무디를 가르친 킴볼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내게 킴볼과 같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가?
3. 그가 영국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디에게 무슨 일을 시작하셨는가?
4. 무디는 대학을 다니지 못했지만 당시 미국의 최고 수준의 대학생들과 지성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변화 받아 우리나라와 세계에 선교사가 되게 하였다. 그의 자서전을 읽고 그 비결을 찾아보자.
5. 지금 우리나라의 세계선교 열기는 그 당시 미국처럼 왕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능력 있는 선교를 할 수 있을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자.
6. 그의 삶과 영성을 보면서 자신의 새로운 결단은 무엇인가?

 

 

>> 연결고리 : 미국목사

나그네 (비회원)
    • 글자 크기
칼빈주의 5대교리 (by xe)

댓글 달기

첨부 (0)
위로